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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하는질문

제목 [기본] 벌금제에 대한 고민 5 - 돈으로 자유를 사다. 등록일 2015.03.22 18:57
글쓴이 장발장은행 조회 1232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인간이 극복해야 할 악이란 어떤 것일까? 철학자 칸트는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을 구분해, 인간이 극복해야 할 악은 자연적 악이 아니라 도덕적 악이라고 설명했다. 불평등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루소도 칸트처럼 자연 신체적 불평등과 정치 도덕적 불평등을 구분해, 자연 신체적 불평등은 어쩔 수 없지만, 정치 도덕적 불평등은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이 해소된 적은 없었고, 정치 도덕적 불평등은 정당화되거나 외면되어 왔다. 자연·신체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전생의 죄, 신의 섭리 운운하며 종교적 세계관으로 뒷받침하기까지 했다. 그런 의미의 도덕적 악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불평등을 방치하거나 정당화시켜서는 안된다.

 

 물론 인간이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이 아닌 다음에야 최소한의 불평등은 불가피한 것일 수 있다. 누구는 키가 크고 누구는 작고, 힘이 세거나 약하고, 지능이 높거나 낮고, 잘 생기거나 그렇지 않고, 부잣집에 태어나거나 가난한 집에 태어나는 등, 우리는 구체적 행위와 관계없는 선천적 불평등을 경험한다.

 

 하지만 평등하지 못한 상태, 즉 불평등이라는 말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듯이, 불평등은 극복의 대상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한 불평등을 방치하거나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외침도 곳곳에서 들려 왔다. 외적 혹은 사회적 불평등이 인간의 본질일 수 없다는 목소리도 늘 있어 왔다. 가령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웠던 프랑스 혁명(1789)은 인간의 평등을 향한 끝없는 도전의 결과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이가 하늘을 모시고 있고(侍天主) 인간이 하늘(人乃天)이라며 남녀노소의 동권을 선포한 동학혁명(1894-1895)이 인간의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던 근대적인 도전이었다. 인도에서는 붓다가 힌두교의 계급 차별에 도전하며 평등사상을 꿈꾸었고, 이스라엘에서는 예수가 그랬다. 자연적 불평등이 사회적 불평등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각자들의 비전이었고, 자연적 불평등을 사회적 평등으로 만들어가는 일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태생적인 이유로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희생당하는 일이야말로 정말 불평등하다는 것이 스승들의 한결같은 입장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교과서에서 배우며 자랐다.

 

 신분의 차별도, 성별 차이도, 신체의 크기도, 피부색의 다름도, 그 어떤 것도 자신이 만들었거나 스스로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선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은 정말이지 최소한의 것이어야 하고 또 최소화해야 한다. 선천적인 불평등의 사회적 최소화가 오늘날 인류애의 기본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최소화를 위한 장치를 만들어내는 일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목숨 걸고 그 최대한의 노력을 다한 이들로 인해 오늘날 그나마 평등이니 하는 용어를 입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평등을 위한 오랜 노력들

 

 예수 같은 이는 신에게는 차별이 없으니 사회적으로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주신다고 믿었다.(마태 5, 45) 햇빛과 비의 입장에서는, 즉 신의 눈으로 보면, 인간에게 선·악, 정·오, 우·열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보는 평등한 은총의 세계였다. 하지만 이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을 구현하는 데 목숨까지 바쳐야 했으니, 평등 세상에 대한 희망은 저절로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평등에 대한 상상이라도 하게 된 이면에는 누군가의 목숨 건 저항이 있었던 것이다. 그 저항을 통해서만 평등은 겨우 희미한 모습을 드러내왔다. 인권이라는 것도 인간을 억압하는 상황에 대한 저항의 산물이었다.

 

 이렇게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는 대부분의 것들이 알고 보면 누군가의 저항의 결과였다. 모든 이가 출가해 열반에 들 수 있도록 허락한 붓다는 당시 힌두교 사제들에 의해 삿된 가르침(외도)으로 비난받았다.

 

 무함마드가 알라는 한 분이시며 알라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다고 하자, 자신들의 최고신을 농락했다며 당시 기성세력은 무함마드를 죽이려 했고 전쟁을 선포해왔다. 그런 식으로 선구자의 삶은 쉽지 않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는 자명하고 단순한 사실을 제대로 느끼는 이들의 저항을 통해 그나마 이 정도로 굴러왔다.

 

캠페인 <43,199>, 불평등을 최소화하자는 운동

 

 인권연대에서 벌이는 ‘캠페인 43,199’는 사회적 불평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이다. 재소자들의 자존감을 세우고 인권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지속해나가고 있는 ‘평화인문학’ 강의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도덕적 악, 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만 하다. 무엇이 악이던가?

 

 불평등이 개선될 수 있는데도 알면서 회피하거나 모른 채 유지시키는 행위가 도덕적 혹은 정치적 악이다. 자연적 악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악은 극복되어야 한다.

 

 수감 생활 대신 벌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는 한편에서 보면 인간에 대한 배려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구속’이냐 ‘자유’냐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결국 돈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여전히 불평등한 구조의 연장이다.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갇혀야 하는 구조는 참으로 비인간적이다.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힌 이가 2009년 기준으로 43,199명이라니, 여전히 4만여 명이 벌금 미납을 이유로 ‘노역장 처분’을 받고 있다니,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들이 아닐 수 없다. ‘돈’으로 ‘자유’를 제약하거나 획득하도록 방조하는 사회는 비도덕적 사회이며, 극복의 대상이다. 도덕적 악을 극복하고 정치적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저항은 그래서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책적 대안들은 이미 여러 전문가들이 글로 정리했으니 차분히 읽어볼 일이다. 그리고 흥분하고 한 번 더 목소리를 낼 일이다. 43,199의 사회적 의미를 기억하고 저항해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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